[GL] 적의 친절

22. “…….” “…….” 다음 순간 두 사람이 만든 침묵엔 극명한 온도차가 있었다. “…….” “…….” 평소 두 사람이 냈던 분위기와는 어쩐지 정반대의 구도였다.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한 아우라를 내며 좀처럼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던 쪽은 희조였다. 말하자면 희조는 그 별명과 꼭 어울리는 속성의 인간으로 고요한 호수 위에 유유히 떠 있는 백조답게 아무...

21. 집인데 집에 가고 싶다. -라고 희조는 생각했다. 이 아이러니한 생각은 단순한 푸념이나 말장난이 아니었다. 희조는 지금 진심으로 두 가지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본래 집, 아니, 적어도 ‘이 집’이 아닌 ‘다른 집’이면 어디든 가고 싶었다. 할머니가 입원한 병원과 가까운 여관이라도, 병실 한쪽 작은 간이침대에서 쪽잠이라도 자고 싶었...

2부

2부 20. 옛날 어느 왕국에 칭찬받기 좋아하는 공주가 살았습니다 공주는 아들이 아니었기에 오빠들과는 달리 거친 흙과 모난 돌로 뒤덮여 언제나 흉년인 영토를 물려받았습니다. 공주는 이 땅을 반드시 좋은 곳으로 바꿔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칭송받는 여왕이 되어 보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즉위식을 치르고 공주는 세상에서 가장 척박한 왕국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여왕은...

19(1부 최종화). ‘선택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프리미엄 주거 공간’ -이라는 문구가 금박으로 새겨진 카드를 희조는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입주민 전용 원패스예요.” 일종의 출입 카드 키죠. 승아가 드립포트로 물을 따르며 말했다. 치이익-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승아의 말소리보다 조금 더 높은 톤이었지만 결코 거슬리지 않았다. “내 거예요. 비상용.”...

18. 그러나 곧 하라는 깨달았다. 헌신적이다 못해 희생적이라고까지 느껴질 만큼 더없이 극진하고 정성스럽게 저를 대해주는 희조의 태도는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희조가 해왔던 스타일이었다는 것을. 매 순간 진심을 다하는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열의를 쏟는 것. 노하우랍시고 꼼수를 부리거나 괜한 기싸움을 벌이지 않는 것. 그래서 ...

17. “저…… 티, 팀장님!” 그러나 희조도 꽤나 독하다는 말을 듣는 애였다. “외람되지만 그건 곤란할 것 같습니다.” 희조는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보이려 애섰다. 단순히 자존심 때문에 버티는 말이 아니었다. 희조의 대답은 분명 예외적인 것이었으나 불가항력적인 선택이었으며, 동시에 진실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집에…… 돌아갈 수 없어서요.” ...

16. “…….” 희조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떼곤 하염없이 눈꺼풀만 빠르게 깜빡이며 어쩔 줄을 몰랐다. 느닷없이 누군가 있는 힘껏 제 멱살을 잡는 것만 같았다. [내가 경찰 부르겠다고 하니까 그러면 아가씨도 같이 잡혀간대. 아가씨 돈을 그러엏-게 많이 빌렸다면서?] 희조는 휴대폰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승아에게서 황급히 등을 돌렸다. ...

15. 여기 백조로 불리는 여자가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이 여자는 일주일에 100시간을 일했다. 하루 약 14시간. 이보다 적게 일한 적이 드물다. 공식적으로 보고되는 근무시간이 이에 반쯤은 될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맡은 일을 조용히 밀고 나가는 끈기는 가히 독하다고 할만했다. 백조는 물밑에서 늘 바쁜 법이니까. 불과 몇 달 전까지 이 여자...

14. 콸콸 쏟아지던 물이 잠기고, 펑펑 쏟아지던 눈물도 그치고, “…….” 누군가에 의해 말문도 막혔다. “…….” “…….” 마침내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제야 희조는 화장실에 나지막이 음악이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 “…….”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 민망한 침묵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메워주는 소리가 있었으니까. 이따금 불편한 상황에 처할 때...

13. “희조야.” “전…… 제가 잘 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럼, 넌 잘했어. 단지-” “딱 죽지 않을 만큼.” 응? 하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딱 죽지 않을 만큼…… 그렇게 일했어요.” “그랬니.” “…….” “그랬구나.” 고생 많았지. 하라의 말을 듣자마자 희조는 후회한다는 듯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떼를 썼다가 어르고...

12. 희조가 막 일을 시작했을 때였다. “언젠가 자기혐오와 회의감을 무시할 수 없어질 때가 와.” 동료가 지나가며 한 말이 있었다. “그때가 바로 일을 그만둘 때야.” 센터에 들어오기 전 이미 다른 분야에서 사회생활을 꽤 했다던 사람의 말이라 어쩐지 기억에 남았다. 이 순간 희조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그래요. 그리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절...

11. 백조를 사냥할 순 없다. 포획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귀한 존재 백조. 혹여 집단 서식지라도 발견되면 기삿거리가 되고 각별한 보호를 받으며 수많은 포토그래퍼들을 출사하게 만들어 그 앵글에 고이 담긴다. 비단 이 나라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백조는 일찍이 세계적으로 귀하디 귀한 존재로 어느 왕국에선 종 자체가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