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희조야.” “전…… 제가 잘 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럼, 넌 잘했어. 단지-” “딱 죽지 않을 만큼.” 응? 하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딱 죽지 않을 만큼…… 그렇게 일했어요.” “그랬니.” “…….” “그랬구나.” 고생 많았지. 하라의 말을 듣자마자 희조는 후회한다는 듯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떼를 썼다가 어르고...
12. 희조가 막 일을 시작했을 때였다. “언젠가 자기혐오와 회의감을 무시할 수 없어질 때가 와.” 동료가 지나가며 한 말이 있었다. “그때가 바로 일을 그만둘 때야.” 센터에 들어오기 전 이미 다른 분야에서 사회생활을 꽤 했다던 사람의 말이라 어쩐지 기억에 남았다. 이 순간 희조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그래요. 그리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절...
11. 백조를 사냥할 순 없다. 포획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귀한 존재 백조. 혹여 집단 서식지라도 발견되면 기삿거리가 되고 각별한 보호를 받으며 수많은 포토그래퍼들을 출사하게 만들어 그 앵글에 고이 담긴다. 비단 이 나라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백조는 일찍이 세계적으로 귀하디 귀한 존재로 어느 왕국에선 종 자체가 여...
10. “자기소개 한 번 해 봐요.” 역시 적이다. [그 여잔 적이야.] [그것도 아주 성가신 적.] 이한의 메시지가 절로 떠올랐다. “…….” “서희조 씨.” “…….” “자기소개, 하라니까?” 적. 그것은 단지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로 치닫는 관계였다. 승부나 경쟁을 떠난다 해도 서로가 불화와 충돌, 분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희...
9. “왜, 죽기라도 했을까 봐?” “……놀랐잖아요.” 간병인이 희조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정확히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15분 전이었다. 달리 말하면 희조가 직무를 바꾸고 첫 출근을 한지 약 45분이 경과하던 때였고, 앞으로 자신의 직속 상사인 동시에 센터의 보스나 다름없는 여자에게 경력직 ‘신입 사원’으로서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걱정 마라. 네 아비...
8. 인생은 타이밍이다. 아버지란 작자가 그 말을 할 때마다 희조는 자신의 삶이 비스듬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평평한 대지여도 남들처럼 걸을 수 있을까 말까 할 지경인데 어째 갑자기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공교롭게도 희조의 아버지가 말한 타이밍이란 적기가 아니라 좋지 않은 때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연락 두절이었던 그가 그런 말을 하며 한...
7. 심리적 안전은 최근 훌륭한 직장의 핵심적인 요건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요컨대 건강한 멘탈을 유지시켜준다면 직원들 역시 훌륭한 근로자가 되어 특출난 성과와 높은 생산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저해시키는 요소가 생각보다 만연해 있다는 것인데- [당신, 백승아를 조심해.] 희조의 경우도 그랬다. 아니, 앞으로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며칠 전...
6. 툭. 통화가 종료되지 않은 휴대폰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힘이 풀려 버린 까닭이었다. 일순 온몸의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 그러나 희조는 이 기분 나쁜 감각을 낯설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 희조는 어릴 때부터 이 느낌을 불운의 속삭임이라며 혼자 명명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잦게 찾아왔고, 익숙했고, 심지어 친근하기까지 했던 감각이었다. 아등바등...
5.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는 말을 희조는 끔찍이 싫어했다. 아니, 이제부터 싫어하기로 했다. 그 말은 일단 진실이 아니며 그 산 증거가 바로 자신의 인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 -이라는 말도 희조는 지금부터 맹렬히 싫어하기로 했다. 이 말은 진실이라서 싫었다. 그 산 증거 역시 공교롭게도 자신의 인생이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아니...
4. 희조와 이한의 결혼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백조와 흑조가 만났다고 떠들어댔다. 그건 칭찬이었다. 어쩜 만나도 끼리끼리 만난다며 유유상종의 좋은 예가 바로 희조 부부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진이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법적으로 희조의 배우자였던 그가 흑조로 불리는 까닭은 간단했다. 그게 그의 최초의 전성기 때 불렸던 별명이었고, 그의 겉모습을 ...
3. “뺨이라도 때려보지 않을래요?” 우아하게 꼰 다리에 한쪽 팔꿈치를 얹고, 그 위로 턱을 괸 채 승아가 말했다. 방금 전 질문, ‘뺨이라도 때려보지 않을래요?’ 와 같은 대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야말로 아주 간드러지는 눈웃음과 화사한 표정이었다. 누군가 봤다면 아직도 내가 쓰는 걸 안 사고 뭐 하냐는 눈빛으로 자신만만하게 화면 너머를 쳐다보는 화장...
2. 서희조. 이 세 글자의 이름만을 들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름의 주인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쉽게 가늠하지 못했다. 그다지 흔하게 쓰이는 이름이 아닐뿐더러 어쩐지 중성적인 느낌의 어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언컨대 ‘서희조’ 이 이름의 소유자를 직접 보게 된다면, 심지어 이 이름에 담긴 뜻이 ‘희고 고운 백조’라는 걸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아, ...
웹소설(GL) zezeme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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